5. 메이레키 대화재: 화재와 소요는 에도의 꽃이다.
5-1. 거대도시로 성장한 에도, 다가오는 위기
17세기 에도는 거대도시로 성장하여 이미 교토를 뛰어넘었다. ‘달팽이’ 모양의 도시계획 덕분에 도시가 빠르게 확장되었으며, 경제와 문화적으로도 융성했다. 센고쿠 시대의 혼란이 점차 잊혀지면서 무사의 긍지는 사라져갔고, 이로 인해 새로운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위험의 시작은 1651년 4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의 급사였다. 그의 죽음 이후 불온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유이 쇼세쓰(由井正雪)의 난’ 같은 소동이 이어졌다. 방화를 일삼는 무리들이 등장하면서 도시의 안전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5-2. 불길이 휩쓴 에도, 초토화된 도시
1657년(메이레키 3년) 정월, 건조한 계절풍이 강하게 불던 중 혼고마루야마(本郷円山)의 혼묘지(本妙寺)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강풍을 타고 불길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에도의 주요 지역이 초토화되었다.
불은 니혼바시를 넘어 핫초보리(八丁堀), 레이긴지마(霊岸島), 스미다강 건너 후카가와(深川) 지역까지 번졌다. 결국 화재는 다음 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진압되었지만, 에도성 혼마루가 소실되는 등 도시의 3분의 2가 파괴되었다. 사망자는 3만 명에서 10만 명에 이르렀으며, 이 사건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될 만큼 엄청난 재난이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그를 보았습니다. 강호(江戶, 에도)에 불이 났는데 매우 참혹했다 하였습니다. 대개 저 나라의 관백이 연소하여 배우들의 연기 구경을 탐하기 때문에 재상의 무리가 상의하여 먼저 한 곳에 구덩이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화약을 장치해 두었습니다. 그러고는 거짓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구경한다고 말을 퍼뜨려 배우들을 모두 이곳으로 모이게 한 다음 그 곳에 불을 놓았는데, 온 성안이 남김없이 모두 타버렸고 심지어는 불을 피하는 사람들이 성의 해자에 빠져 죽은 자가 모두 40여 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효종 8년 8월 5일)
<메이레키 대화재의 피해가 컸던 이유>
◉ 도시 구조의 문제: 조카마치(城下町) 면적의 70%가 무가 저택이었고, 조닌(상공업자)의 주택은 15%에 불과했다. 서민 주거지는 인구 밀집도가 높아 화재 확산이 빨랐다.
◉ 교통 인프라 부족: 스미다강을 건너는 다리가 센주(千住) 대교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탈출하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군사적 이유로 다리 건설이 제한되었지만, 이는 재난 시 큰 걸림돌이 되었다.
5-3. 도시 재건과 방재 대책 강화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의 섭정이었던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는 에도성 혼마루 재건을 포기하고, 그 비용을 도시 재건에 투자했다. 화재 발생 원인이 된 혼묘지의 승려들은 처벌하지 않았지만, 피해자 구제와 복구 작업을 지원하도록 했다.
막부는 이재민을 지원하기 위해 쌀을 배급하고, 목재와 곡물의 가격을 통제했다. 또한,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해 히로코지(広小路, 소방용 공터) 를 설치하고, 건축 규정을 개정했다. 벽에는 흙과 회를 바르게 했고, 지붕은 기와 사용을 의무화했다.
재난 이후 스미다강에는 료고쿠 다리(両国橋), 에이타이 다리(永代橋) 가 새롭게 건설되었으며, 동쪽 지역은 무사시(武蔵)로 편입되었다. 이는 에도의 도시 확장을 촉진하며 이후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함께보면 좋은 글
1. 메트로폴리스
도쿄 여행 가이드: 나홀로 여행객이 사랑하는 메트로폴리스
1. 메트로폴리스, '도쿄' 여행플랫폼 ‘트리플’의 데이터에 따르면, 도쿄는 나홀로 여행객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로 전체 중 12.6%의 선택을 받았다. 그 뒤를 후쿠오카(9.7%), 오사카(9.5%), 타이베
picklepedia.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