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서울의 현대 역사(대한민국) 해방 직후 서울의 공식 명칭은 여전히 ‘경성부’였지만, 미군정 표기와 서울시 자체 표기가 다를 정도로 ‘서울’, ‘경성’, ‘한성’ 등의 명칭이 혼재되어 사용되었다. 이를 정리하기 위해 1946년 8월 15일 《서울시헌장》이 발표되었으며, 공식적으로 ‘서울시’라는 명칭이 확립되었다. 이후 1949년 11월, 지방자치법이 공포되면서 ‘서울특별시’라는 현재의 명칭이 정식으로 확정되었다. 제1장 제1조.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하고 이를 특별자유시로 함. (서울시헌장) 이 과정에서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형민은, 이승만의 호를 따서 ‘우남시(雩南市)’로 하자는 정치적 압력을 거부하고, ‘서울’이라는 명칭을 관철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5-1. 서울의 확장과 강남 개발 서울은..
4. 서울의 근대(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에는 ‘서울’이라는 명칭이 정식 명칭인 ‘한성부’나 ‘한양’보다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명칭이 공식화된 계기는 1896년 4월 창간된 독립신문이었다. 해당 신문의 국문판에는 ‘서울’, 영문판에는 ‘Seoul’로 발행지가 표기되었으며, 이 ‘Seoul’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공식 영문 철자가 되었다.1890년대부터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용산 일대에는 일본 세력이, 마포구 당인동 일대에는 중국 세력이 진출하였다. 이후 일본은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5)에서 승리하며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고, 결국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대한제국 황제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
3-1. 경복궁의 구조와 역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왕의 행차나 외국 사신들이 출입하는 중요한 문이었다. 문 가운데 어칸(御間)은 오직 임금과 왕비만이 드나들 수 있었고, 동쪽 문은 문신(文臣)이, 서쪽 문은 무신(武臣)이 이용했다. 참고로 건춘문은 왕실의 종친들이, 영추문은 문무백관들이 출입했으며, 북문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되지 않았다.궁궐 내부는 광화문을 시작으로 흥례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으로 이어졌으며, 궁궐 동쪽(왼쪽)은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 서쪽(오른쪽)은 임금과 신하가 만나 정무를 보는 ‘경회루’와 학문 연구소인 ‘집현전’, 그리고 궁궐 내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가 배치되어 대칭을 이루었다.궁궐 앞 도로는 오행설(五行說)에 따라 ‘주작대로(朱雀大路)’..
3. 서울의 근세 역사(조선 시대) 고려 말,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뒤, 1392년 개성 수창궁(개성 도성 내 서소문 안에 위치한 궁궐)에서 즉위하며 조선을 건국했다. 이후 새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민심을 다잡기 위해 1394년 10월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했다.한양은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여 조정의 통치력이 전국적으로 미칠 수 있는 지리적 장점이 있었다. 또한, 강화도에 모여 있던 전국의 조운선(세곡 운반선)들이 밀물 때 한강의 역류하는 흐름을 타고 주요 포구(용산, 마포나루, 노들나루, 광흥창, 여의나루, 한강진, 잠실나루 등)로 쉽게 접근할 수 있어 물자 조달이 편리했다. 방어적인 측면에서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로, 외적의 침입 시 성을 쌓아 방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