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반도 헌법의 역사 Ⅴ: 유신정권(제4공화국)
11-1. '유신'이라는 이름의 무게
혹시 ‘유신(維新)’이라는 말을 아는가? 시경(時經) 대아편(大雅篇)에 나오는 말로 제도나 체제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周雖舊邦 其命維新(주수구방 기명유신)
주나라가 비록 옛 나라이나 그 명이 새롭도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 새로운 근대로 나아갔지만 1945년 전범국으로 패망의 길을 걷고 말았다.
중국도 일본처럼 1898년 변법유신(변법자강)을 펼쳤지만 결국 서태후에 의해 좌절되었다.
1972년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을 벤치마킹하며 제4공화국의 시작을 알렸지만, 그 결과는 민주주의 퇴행이었다.
11-2. 비상조치로 밀어붙인 개헌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 일부를 정지시켰다.
계엄포고 1호① 모든 정치 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한다. (중략)
②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은 받아야 한다.
③ 각 대학은 당분간 휴교 조치한다.
④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행위를 금한다.
⑤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⑥ 야간통행금지는 종전대로 시행한다.
⑦ 정상적 경제 활동과 국민의 일상 생업의 자유는 이를 보장한다.
⑧ 외국인의 출입국과 국내 여행 등 활동의 자유는 이를 최대한 보장한다.
이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수색, 구속한다.
곧이어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쳤고, 12월 27일 유신헌법이 공포되며 사실상 헌정 중단 상태에 돌입한다.
열강의 세력균형의 변화와 남북한 간의 사태진전에 따른 평화통일과 남북대화를 추진할 주체가 필요한데, 현행법령과 체제는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오늘날의 상황에 적응할 수 없으며, 대의기구는 파쟁과 정략의 희생이 되어 통일과 남북대화를 뒷받침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비상조치로써 체제개혁을 단행한다.(대통령특별선언)
11-3. 대통령에 권한을 몰아주는 유신헌법
유신헌법은 ‘1구2인제’ 형태의 중선거구제를 도입한다. 그리고 국회의 3분의 1은 대통령 영향권 아래 있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한다(입법부 무력화).
제40조 ①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의 국회의원을 선거한다.
대통령 선거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토론 없이 무기명투표로 과반수가 찬성만 하면 바로 대통령이 될 수 있으니, 대통령 종신직을 창조해낸 셈이다(종신 집권 체제 구축).
대통령은 긴급조치권(제53조), 국회해산권(제59조) 등의 막강한 권한을 가지며 주요 정책은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제49조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제53조 ① 대통령은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내정·외교·국방·경제·재정·사법 등 국정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제59조 ①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다.
법원 판사와 대법원장 이외의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토록 하여 유신체제는 사법부의 위상도 근본적으로 변질시켰다.
제103조 ① 대법원장인 법관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
② 대법원장이 아닌 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에 의하여 대통령이 임명한다.
유신헌법에서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자백의 증거능력 제한 같은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는 권리도 대폭 축소되어 버렸다.
제10조 ⑥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ㆍ폭행ㆍ협박ㆍ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에 의하여 자의로 진술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될 때, 또는 피고인의 자백이 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인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거나 이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 (삭제)
제32조 ②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의 제정은 국가안전보장ㆍ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한다.
제54조 ③ 비상계엄이 선포된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영장제도,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박정희는 “정상적 방법이 아닌 비상조치로 체제 개혁을 단행”했다고 스스로 밝히며, 절차적 정당성이 없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단지 국민투표를 거쳤다는 이유만으로 합법성을 주장하는 것은 민주주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 일이다. 절차 없는 헌법은 껍데기일 뿐이다. 유신헌법은 ‘헌법의 형식을 빌린 독재 통치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