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헌법의 역사 Ⅴ: 독일의 바이마르헌
통일 독일을 이끈 비스마르크 체제는 황제 중심의 전제정치였고, 민주주의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황제의 권한은 막강했고, 의회는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황제는 상원의장직을 겸임했고 상원과 하원을 소집할 수 있었으며 수상과 각 부의 장관을 임명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 실각 이후 빌헬름 2세의 제국주의가 본격화되며 결국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고, 독일은 참담한 패배를 맞는다.
전쟁 패배 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영토 축소, 군축, 식민지 상실, 거액의 배상금 등 독일 국민에게 극심한 수모를 안겼고, 6월 의회는 237명이 찬성, 138명이 반대로 조약이 수용된다. 이 여파 속에 1919년 7월 31일 새 헌법이 의회를 통과해 8월 14일 공포된다.
1919년 바이마르에서 열린 제헌의회는 공화제를 명시한 바이마르헌법을 제정한다.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제1조는 민주주의 국가의 출발을 선언했다. 바이마르헌법은 100년 전임에도 차별금지, 주거·신체 자유, 노동권과 소유권 등 기본권 조항이 매우 앞서 있었으며, 대한민국 헌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베버리지 보고서 이전부터 복지국가 모델을 시도하며, 경제적 자유와 사회권을 제도화한 진보적인 헌법으로 평가받는다.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제를 혼합한 이원정부제는 비상시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허용했고,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구조적 허점을 낳았다. 세계대전 이전까지 쭉 전제 군주제 아래에 있던 독일의 국민은 전쟁 패배의 대가로 승전국들이 공화국 체제를 자신들에게 강요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훌륭한 헌법이라 해도, 사회적 합의와 민주주의 수용 태도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 독일 사회는 민주주의에 반감을 가졌고, 결국 나치즘의 등장을 막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