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인민'에서 '국민'으로: 용어의 변화
제헌헌법의 특징 중 하나는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헌법 초안에 쓰였던 ‘인민’이라는 용어가 일제의 용어인 ‘국민’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절 평등임.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선서·주소이전·신체 급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 급 피선거권이 유함.(대한민국 임시헌장)
윤치영 등 위원들은 ‘인민’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나타냈고, 그들의 정치적 압박이 원인이 되어 제헌헌법에서는 ‘국민’으로 변경된다.
인민이라는 단어는 공산당이나 쓰는 단어라 쓰면 안 됩니다.(윤치영 위원)
‘인민’이란 법학적으로 공화국의 구성원을 말한다.
《표준국어대사전》
명사
1.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대체로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를 이른다.
국중이 태평하여 인민마다 재산이 넉넉하고...
출처 <독립신문>
2. 법률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인
‘국민’은 특정한 국적을 지닌 사람들만을 가리키고, ‘인민’은 지역이나 민족 등 훨씬 다양한 구성원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인민’이 훨씬 보편적인 용어이다.
세계 각국에서 쓰는 보편적인 개념을 단지 공산당이 사용한다는 이유로 기피하는 것은 고루한 편견입니다.(조봉암 의원)
그래서 선진 헌법일수록 주어를 국민이 아니라 인민(People)을 사용한다.
미국 헌법: 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우리 합중국 인민은)
대한민국 헌법: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이는 국가가 있고 국민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혹은 인민이 있고 국가가 있다는 개념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유진오는 회고록을 통해 좋은 단어를 공산당에 빼앗겼다면서 한탄했다고 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국민당, 공산당 모두 ‘인민’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사실에서 ‘인민’이 공산당의 단어라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해 보인다.
쑨원은 정심, 성의껏 모두 앞에서 선서한다. 지금부터 구를 없애고 신으로 바꾸고 자립하여 국민이 된다. 성의를 다하고 전력을 다하여 중화민국을 옹호하고 삼민주의를 실행하고 오권헌법을 채용한다. 정치를 공명하게 하며 인민을 안락하게 하고 국가의 기초를 영원히 강고하게 하며 세계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1919년 1월 중화혁명당 모임에서)
8-4. 제헌헌법, '민주공화국'으로 명시된 의미
정부 수립 초창기 법학자들은 일본에서 공부했거나 식민지 시절 일본 법학을 공부했던 사람들이 많았기에 일본에서 해석한 독일법 이론을 기본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바이마르 헌법'의 기본 구조를 많이 반영하였다. 하지만 바이마르헌법 제1조의 ‘공화국’과 달리 ‘민주공화국’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장에 따른 것으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은 정부임을 명백히 밝힌 것이라 하겠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중략)(전문)
법학 기반이 미약했던 당시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헌헌법은 의미 있는 출발점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