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모이 실화: 국문 시련에 맞선 조선어학회

4. 대한민국의 국문, 한글

 

훈민정음 해례본(위키피디아)

 

현재 세종의 단독 창제설이 인정받고 있다. 『실록』에 반포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과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세종이 친히 만들었다는 기록이 그 근거가 된다. 그리고 세종이 유일하게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말한 것도 바로 훈민정음 창제였다.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는데 그 글자가 옛 전서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었으나 이를 합한 연후에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와 우리나라 이어를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이 훈민정음이다.” (세종실록)

 

세종은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의 책을 편찬했고, 유학자인 정인지 등을 통해 훈민정음 해설서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4-1. 한글의 시련

 

하지만 한동안 지배층에 널리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가 19세기 말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나서야 국문으로서 관심을 받게 되었고 대표 문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고종이 1894년 칙령을 공포하였고, 이를 통해 그간 ‘언문’이라 불리며 하대받던 한글을 나라의 대표 문자인 국문으로 격상시킨다.

 

“법률 칙령은 다 국문을 본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며, 또는 국한문을 혼용하라.” (고종)

 

사민필지(위키피디아)

 

1886년(고종 23년),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ulbert)는 육영공원 영어 교사로 근무하던 중 한글의 우수성에 감명을 받아 1889년 161쪽의 세계지리 교과서이자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펴냈다. 1896년(고종 33년)에는 최초의 순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발행되어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신문을 읽게 됨으로써 민중 계몽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말모이 포스터(위키피디아)

 

1907년(고종 44년), 주시경 선생은 한글강습소에서 여러 제자들(김두봉, 최현배 등)을 길러냈고, 이 제자들이 1921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를 조직하여 일제에 맞서 한글 보급에 앞장섰다.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국어문전음학)

 

1938년부터 본격적인 민족말살정책이 실행(내선일체, 식민사관, 황국신민화, 국가총동원법 등)되면서 1941년 조선어 사용 금지령이 내려진다. 일제가 일본말 상용 정책을 펴면서 <한글>이라는 잡지를 펴내고 한글강습소를 열어 한글 교육을 펼치고 있는 조선어학회를 타깃으로 삼는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핵심 회원(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들을 전격적으로 잡아갔고, 대다수 작가는 일제의 강압에 굴복해 일본어로 쓴 글들을 내놓으면서 한글은 다시 침체기에 들어서게 된다.


 

 
 

함께보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