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 카쓰레쓰의 탄생과 일본 육식 문화의 변천사: 돈카츠의 뿌리를 찾아서

5. 육식 장려와 포크 카쓰레쓰(ポークカツレツ)의 탄생

 

텐구
텐구(위키피디아)

 

1854년, 페리 제독의 흑선을 본 일본인들은 그의 체격에 큰 충격을 받아 그를 요괴 ‘텐구(天狗)’로 묘사했다. 이는 서양인들과 일본인 사이의 체격 차이에 대한 충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서양 교사들은 메이지 덴노에게 일본인의 체격 향상을 위해 육식과 목축을 장려하라고 조언했고, 이는 일본의 식문화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었다. 메이지 덴노는 1872년, 육식 금지령을 해제하고 국민들에게 고기와 우유 섭취를 적극 권장했다. 이른바 '고기유신'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육식을 멀리해온 문화 탓에 일본인은 고기의 누린내에 익숙지 않았다. 그래서 된장, 간장, 사케, 생강 등 다양한 향신료와 재료들이 누린내를 잡는 역할로 요리에 널리 활용되었다. 육식은 단순한 음식 문화의 변화가 아닌, 서구 문명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고, 지배층과 사무라이 계층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슈겐도의 수행자들
슈겐도의 수행자들(위키피디아)

 

그러나 모두가 이를 반긴 것은 아니었다. 혼합종교 슈겐도(修験道)의 수행자 수십 명이 고기 섭취에 항의해 궁궐에 침입하고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격렬한 반발도 있었다. 이는 일본의 육식 도입이 단순한 대중 수요가 아닌, 지배 계층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

 

 
 

5-1. 일본식 커틀릿의 탄생

 

바로 육식 금지령이 해제된 1872년, 『서양요리서(西洋料理通)』에는 ‘홀 커틀릿(ホール コットレット)’이라는 이름으로 커틀릿 요리가 소개되었다. 당시 지배층은 고기에 익숙지 않은 일본인들에게 고기를 어떻게 맛있게 먹일 수 있을지 고심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덴푸라와 커틀릿의 융합, 즉 ‘포크 카쓰레쓰(ポークカツレツ)’였다.

이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진정한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렌가테이(위키피디아)

 

1895년, 도쿄 긴자의 ‘렌가테이(煉瓦亭)’에서 이 요리가 처음 등장했다. 당시에는 소고기나 닭고기가 주로 쓰였고, 이는 프랑스식 커틀릿에 가까운 형태였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에 렌가테이의 주인 키다 겐지로(木田元次郎)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뼈를 발라낸 돼지고기를 얇게 저민 뒤 밀가루 → 달걀 → 빵가루 순으로 옷을 입히고 충분한 기름에 튀겨내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밥, 된장국(미소시루), 생 양배추를 곁들였다.

이 변화는 기존의 커틀릿과 전혀 다른, 일본 현지화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생 양배추는 튀김의 느끼함을 잡아주는 상쾌한 조화로 사랑받았다. 그리고 이 음식은 곧 다른 요릿집에도 퍼지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다.

렌가테이는 지금도 이 요리를 ‘돈카츠’가 아닌 ‘포크 카쓰레쓰’로 부르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포크 카쓰레쓰는 고열량 음식이었다. 이는 단순한 맛의 문제가 아닌, “일본인의 체격을 서양인처럼 키우겠다”는 지배층의 야망과 맞아떨어졌다. 20세기에 들어서는 경양식점, 배달 서비스까지 등장하며 서민들도 집에서 따뜻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고, 포크 카쓰레쓰는 일본 전역에서 가장 사랑받는 요리 중 하나가 되었다.

심지어 2023년 3월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한일정상회담 후 기시다 총리와 함께 2차 만찬 장소로 찾은 곳도 바로 렌가테이였다. 포크 카쓰레쓰는 일본 대중요리의 정체성과 상징을 함께 품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