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공화국의 헌법 개정과 한계: 장면 내각의 명암

9. 한반도 헌법의 역사  Ⅲ: 장면내각(제2공화국)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 순간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 순간(위키피디아)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한 이승만 정권은 정치파동(국회의원 버스 납치, 관제 데모 동원 등)을 통해 두 차례의 개헌을 강행한다.

1차 개헌은 이른바 발췌개헌안으로, 신라회가 주도해 대통령 직선제를 중심으로 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를 중심으로 한 국회안을 절충한 것이었다.

2차 개헌은 사사오입 개헌으로, 정족수 미달에도 불구하고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두 차례 개헌은 절차적 정당성도 부족했지만, 기본권 논의 없이 권력자의 장기집권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4.19 혁명
4.19 혁명(위키피디아)

 

결국 1960315, 부정선거가 전국적으로 자행되면서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고, 이는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게 되며 제1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9-1. 제2공화국 헌법의 출범과 주요 내용

 

국회는 헌법개정기초위원회를 구성해 의원내각제와 양원제 국회를 핵심으로 한 헌법 개정안을 마련하고, 208명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킨다(3차 개헌).

 

제31조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으로서 구성한다.

 

윤보선
윤보선(위키피디아)

 

이후 민의원·참의원 합동 회의에서 윤보선이 대통령, 장면이 총리로 선출되며 제2공화국이 출범한다. 이로써 국민이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의원내각제가 도입된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 상징적인 역할만을 수행하며, 실질적 정권 운영은 총리 중심 체제로 이루어졌다. 이는 영국식 모델에 가까웠다.

2공화국 헌법에서는 지방자치제의 명문화가 이루어진다.

 

제97조 ②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임방법은 법률로써 정화된 적어도 시, 읍, 면의 장은 그 주민이 직접 이를 선거한다.

 

하지만 지방자치의 실제 시행은 김영삼 정부 시절(1995)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또한 헌법재판소 설치도 명문화되며 독일식 상설 헌법재판기관을 지향했지만, 5·16 쿠데타로 인해 실행되지는 못했다. 선거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창설되었다.

 

제75조의 2 선거의 관리를 공정하게 하기 위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둔다.

 

이는 부정선거를 겪고 탄생한 정부로서 당연한 조치였다.

 

 
 

9-2. 제2공화국 의원내각제의 한계

 

의회는 양원제(민의원 233석, 참의원 58석)로 구성되었으나, 실질적으로 민의원과 참의원이 동일한 법안을 이중으로 다루는 구조적 비효율을 낳았다.

 

의회가 민의원, 참의원으로 나뉘었지만 똑같은 법률을 이중으로 다루었을 뿐 고유의 업무는 없었다.(김영구, 내무부 정무차관)
참의원은 (중략) 정치의 초년병의 집합체라 하여 신정부가 요구하는 제 입법을 쾌속도로 제정해야 할 중대시기에 처하여 법안 심의에 있어 심의 지연으로 입법과정에 커다란 장애물이 된 것이 사실이다.(경향신문, 1960.12.26.)

 

총리는 민의원과 참의원을 오가며 정무를 봐야 했고, 민주당 내부의 심각한 계파 갈등까지 겹쳐 정치의 비효율성은 극에 달했다. 국민의 정치적 기대감도 빠르게 식어갔다.

 

장면이 정권을 장악한 지 몇 달 후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3.7%만이 장면을 지지할 정도로 민심이 이반됐다. 미국 정부는 장면의 리더십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 시작했다.(대한민국 만들기, 그렉 브라진스키)

 

제2공화국 기간 동안 제출된 법안은 총 298건으로, 연간 기준으로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이었다. 실제로 이 기록은 1996년 제15대 국회에서야 깨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체 법안의 80%가 회기 내에 처리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되었다. 원인은 정치적 분열과 협치의 부재였다.